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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砥柱中流14] 1월, 박희광 선생을 생각한다.

지비저널 기자 입력 2021.01.17 10:02 수정 2021.04.04 13:40

1월, 박희광 선생을 생각한다.

                          -소설가 정완식

 

 저수지 옆을 따라 금오산에 오르는 길에 동상이 하나 있다. 아래에는 동상으로 선 분의 성함이 적혀 있고 친일파의 사형선고문을 읽는 선생의 부조물이 배경으로 조각되어 있다. 구미가 낳은 애국지사 박희광(朴喜光) 선생이다.

 

 선생은 구미시 봉곡동 출신으로 10세 때 부친을 따라 만주 봉천성으로 이민을 떠났다. 남성자학교를 졸업하고 16세 때 오동진의 대한독립군 통위부에서 중대원이 되었다. 이름은 박상만(朴相萬)으로 활동한 터여서 후일 독립운동 검증과정에서 매우 힘들었다. 비단 박희광 선생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거의 대다수가 변성명을 했다.

 

 혹독한 훈련을 받은 후 선생은 김광추, 김병현과 더불어 암살조를 조직했는데 독립신문은 이들을 삼장사(三壯士)라고 했다. 암살조는 1924년 6월 1일 요녕성 무순 일대의 고등계 첩자이자 여순조선인회 서기였던 정갑주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일본에 넘긴 탓에 집으로 쳐들어가 직접 정과 가족을 처단하고 현지 민회 사무소 문 앞에 글을 남겼는데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번에 의용군 제5중대장의 명령에 의하여 출장하여 정갑주의 사형을 집행함. 그 외에 지산양개(사냥개) 몇개인(몇 명)도 사형이 불원하니 심량(深諒)하라. 너희도 대한민족으로 하필 ○○의 정탐이냐. ○○○○○년 6월 1일. 출장원 박상만 인, 김병현 인”

 연명 인장을 찍은 문서를 보도하며 당시 언론은 왜놈의 정탐과 대한민국 6년이란 연호를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만주 일대에서 만주보민회를 조직해 무장 항일 세력 탄압,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정보 수집, 항일운동가 체포, 폭행, 살상하거나 일본에 넘긴 최정규는 최대 직업친일파였다.

 일주일이 지난 7일 봉천으로 간 세 사람은 최정규를 습격했다. 최의 부하 허균과 최의 장모 이씨를 죽이고 2층에 숨은 최정규는 아쉽게 죽이지 못했다. 그들은 최정규의 집 부근 전신주에 최정규를 암살한다는 말과 아래는 의용군 제5중대 철도연선 토벌 감독 김광추, 박상만, 김병현의 연명 날인한 글을 붙였다.

 

 경찰을 피한 그들은 봉천성 안에 있는 금정관이라는 조선요리점에 들어가 군자금 3백원을 받고 영수증을 써 줄 시간도 없이 포위한 중국관헌과 싸움이 벌어졌다. 김광추는 탈출하고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무기징역형을 받은 선생은 후일 20년으로 감형되고 1943년에 출옥해 국내로 돌아왔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의 경호를 맡았으나 김구선생이 돌아가시자 대구로 내려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1968년에야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국민장 독립장을 받았다. 비밀작전을 펼친 암살대원의 투쟁을 증명할 방법이 적었다.

 1970년 1월 22일 서울 보훈병원에서 타계,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박희광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박희광선쟁지상(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이라는 휘호와 지원금을 주었다. 1983년 구미문화원 추진위원회와 구미시, 각계인사들의 정성을 모아 금오산에 동상을 세웠다. 대구 두류공원 내 조각공원에도 흉상이 세워졌다.

 

 하마터면 잊힐 뻔했던 우리 고장 출신 무장독립운동가의 삶이 다시 햇빛을 보고 각계의 정성으로 동상을 세운 지 벌써 40여 년이 가까워진다. 동상은 소박하나마 정성을 모아 세우는 것이다. 대량의 예산을 투자하거나 성금을 모아 수십 개, 수백 개씩 만든다면 우상이 된다.

 

 

 

 

 

*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견해이며, 지비저널의 편집 방향과는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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