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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砥柱中流8] 인삼은 영약이다.

지비저널 기자 입력 2020.12.06 16:26 수정 2021.04.04 13:37

인삼은 영약이다.

             -소설가 정완식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다. 늘어선 나무 사이로 축축한 습기 머금은, 낙엽 깔린 숲길을 걸은 끝에 하얗게 햇빛을 받으며 외롭게 앉은 자그마한 애기능(永懷園)에 도착했다. 그때는 묘가 작아서 애기능인지 애기의 무덤이라서 애기능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민회빈 강씨의 능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자호란이후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농사를 지어 노예로 팔리는 수백 명의 조선인들을 속환시켰다. 그들과 함께 농장을 만들어 조선 농법을 실시하는 한편, 무역을 통해 부를 쌓는 중상주의 정책을 연습하고 서양문물을 습득했다. 이때 그녀가 무역상품으로 취급한 것이 약재, 담배, 가죽, 인삼 등이었는데 특히 고가의 거래품은 인삼이었다. 그러나 귀국한 후 남편 소현세자는 죽고 자신도 사약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가해자는 묘호만이 어진 시아버지 인조였다.

 

 고려인삼은 중국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는 특별한 상품이었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천금을 주고도 못 살 정도였다고 하며 일본에서는 고려인삼이라면 무조건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중 먹고살 만한 사람은 거의 인삼을 많이 판매하던 상인이었다. 상해의 인삼 상인들은 많은 자금을 임시정부에 보탰고, 독립운동가들도 인삼을 팔아 자금을 충당했을 정도이니 중국에서 인삼은 현금과 마찬가지였다. 윤봉길 의사도 한때 인삼 행상을 했다는 말이 전한다. 이처럼 인삼은 조선의 청년들을 이국에서 먹여 살리고 끊어질 위기의 정부를 살려냈다. 인삼이 가진 약효 성분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라 인삼의 혼이 조선과 조선인을 살린 셈이다.

 

 일본 역시 인삼을 중요시해 홍삼은 전매제도를 확립했다.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중국에 팔았던 인삼은 수삼이나 건조한 백삼이 대부분이고 태극삼도 취급했을 것이다.

 

 구미에도 인삼이 특산물이란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대망리가 구미 인삼의 재배지인데 신천 강씨의 오랜 세거지였다.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1920년 무렵에 고 강명연 옹이 인삼재배기술을 개성 출신의 한 노인에게 전수 받아 접성산과 꺼먼재산 구릉지에 재배를 시작한 것이 효시라 한다. 대망 인삼은 북향의 구릉지로 일광이 적고 서늘하며 물빠짐이 좋은 기후와 토질이 맞아서인지 굵고 약효가 좋다고 한다.

 

 인삼은 대체로 재배에 5년가량이 소요되고 지력을 많이 소모하는 작물이다. 가림막을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 소요가 막대했다. 그래서인지 인삼 재배가 그리 비약적으로 늘지 않았고 대규모 경작이 아니어서 자체 브랜드가 없었던 모양이다.

 

 경북의 대표적인 인삼재배지는 풍기다. 지인은 1970년대에 풍기 인삼상인들이 대망리에 몰려들었다고 기억한다. 그렇게 팔려간 인삼은 풍기인삼이란 이름을 달고 팔렸다고 한다. 유통은 자본 싸움이다보니 대규모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에 개성인삼이 가공의 고통(?)을 거쳐 홍삼으로 제조되어 일본인의 손에 의해 수출된 것 같은 운명이다. 지금은 대망 인삼도 금오산 인삼이란 이름으로 홍삼으로 가공하고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나라를 잃었던 시절, 청년의 등에 업혀 비록 이국으로 몸은 팔려 나갔지만 조선인의 혼을 세워 주었던 영약 인삼이 다시 우리 고장의 특산물로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견해이며, 지비저널의 편집 방향과는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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