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구미와 우리 시대 구미사람들’
기자든 작가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기자는 구미에 위치한 27개 읍면동 전체에 대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벽화를 그리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지역을 정리하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만나고자 한다. 물론 기자가 그 벽화를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겠지만, 기자가 하고 싶은 꿈인 구미 27개 읍면동의 벽화를 그리는 흉내를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고아읍이다.
↑↑ 고아읍 청사 입구에 있는 비석 |
1> 고아읍의 유래와 현황 그리고 인물들
고아(高牙) 높을 고(高)에 어금니 아(牙)자를 쓰는 고아(높은 곳에 깃발을 꽂은 아성)읍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현 읍사무소 아래 고아부곡(高牙部曲)이라는 곳이 있었다는 설과 고소아리동리(高所牙里洞里) 즉, 고려군의 아성(牙城)의 소재지(所在地)를 줄여 고아(高牙)라 불렀다는 설이 그것이다.
↑↑ 고아읍 청사- |
현재 고아읍은 구미의 중심을 이루는 고장이라 말한다. 이곳은 일찍이 후삼국시대 고려와 후백제간 통일 전쟁의 현장이었으며, 구미의 정신으로 추앙 받는 야은 길재, 조선 중기 김취문 선생, 초서의 대가로 이름 높은 고산 황기로, 그리고 동편제의 거장 박록주 명창, 1920년대 한국 초창기 영화를 이끈 김유영 감독 같은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난 고장이다.
↑↑ 삼강정려각 |
고아읍은 2020년 8월 현재 36,649명(전체 13,873호 중 농가25%, 비농가75%)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47개리 490개 반과 56개의 자연부락이 위치한다. 총면적은 63.46㎢(주거4.26, 상업0.31, 녹지26.82, 임야32.24, 기타0.2)이며, 대부분이 임야와 녹지로 이루어졌다. 주요 문화재로는 삼강정려각(한 마을에서 충신 길재, 효자 배숙기, 열녀 약가가 태어난 마을, ‘편집자, 그 시대의 정신으로 그 시대를 평가해야 한다’), 대월재, 매학정, 김종무 장군 충신정려비 등이 있으며 쌀, 맥류, 인삼, 수박, 참외, 방울토마토, 사과, 배추가 생산되고 고아읍에 입주 기업은 206개사이며 1,200여명의 근로자가 근무하고 있다.
↑↑ 김종무 장군 충신정려각 |
현재 고아읍과 선산읍을 가로지르는 감천은 조선 중기 이전에는 현재 읍사무소가 위치한 관심1리 뒤편으로 흘러 이례리, 예강리를 거쳐 모갈 앞 보천탄과 마주보는 지점에서 낙동강과 합류했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로 보면 후삼국 시대 마지막 전장터였던 일리천(감천) 전투가 증명되는 셈이다.
또, 지난 1976년 봉한1리 새마을 농로개설 현장에서 금동삼존여래불상 3점(여래입상 1점, 관음보살상 2점)이 발견됐다. 이 금동불상 중 여래입상은 국보 182호, 관음보살상은 국보183와 184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돼있다.
↑↑ 길재 선생 생가 유허비 |
고아를 빛낸 인물들(高牙人物).. 길재, 김취문, 황기로, 박록주, 김유영 선생
고아를 빛낸 대표적 인물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라는 시로 유명한 길재(吉再) 야은(冶隱, 1353년, 고아 봉계리) 선생이다. 선생은 해평 길씨로 1386년 과거에 급제, 성균관학정, 성균관박사, 문하주서를 역임하였지만 나라가 망할 것을 예감 고향으로 낙향한다. 조선이 건국한 후 태상박사 등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모두 거절하고, 세종 즉위년인 1419년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에게 조선 왕조로 출사를 허락했으며,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그의 학문과 제자들(김숙자, 최운필,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진다)이 사림파를 이루는 근간이 됐다. 야은 길재 선생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말 삼은으로 불렸다.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구미시 오태동에 길재의 묘소가 있으며, 그 앞에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가 있다. 지주중류비는 1587년 인동 현감 유운룡이 세웠다. 이 비의 앞면에는 한강 정구가 중국에서 탁본해 온 중국 명필 양청천의 글씨인 지주중류(砥柱中流)를 새겼고, 뒷면에는 유성룡이 지은 ‘야은 선생 지주비 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가 음각되어 있다. 1789년 다시 세웠다. 금오산 입구에 채미정이 있으며, 고아읍 봉한리에 생가터와 생가유허비가 있다.
↑↑ 김취문 선생의 대월재 |
청백리로 이름 높은 구암(久菴) 김취문(金就文1509~1570)선생은 고아읍 원호리 출신이다. 김취성(金就成) 선생의 아우인 선생은 1537년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감사, 호조참의, 부제학, 대사간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청렴하고 근검하여 명종 때 청백리로 녹선됐다. 또한 청송부사 시절 친우였던 이황 선생이 외아들을 보내 글을 배웠다고도 전한다. 임금의 외척 윤원형을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 후 고향 고아 원호리로 낙향, 대월재(對越齋)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대월재는 1543년 처음 지어졌고, 임진왜란 당시 일부 소실된 것을 1677년 복원하여 서당, 종회소 등으로 활용되다, 1868년 중건됐다. 김취문 선생 사후 임금이 친히 제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성균관사를 추증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생들이 높은 덕을 추모하여 형인 김취성과 함께 낙봉서원과 서산사에 배향됐다.
↑↑ 황기로 선생의 매학정 |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1~1575?고아읍 대망2리, 망장)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고산 선생은 1534년(중종 29)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부친이 남곤과 심정의 사주를 받아 조광조를 처단할 것을 주장하다 사판(士版)에서 삭제된 일로 인해,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초성(草聖)이라 불릴 정도로 초서에 능하였으며, 이백의 시를 옮겨 쓴 초서가행이 있으며, 이군옥의 오언율시를 초서로 쓴 이군옥시가 보물 제1625-1호로 지정됐다. 고향에 위치한 고산에 매학정(梅鶴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아호 고산은 중국 서호 고산(孤山)에서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렸던 북송의 은둔시인 임포(林逋)의 처사적 삶을 동경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는 아들이 없었는데 율곡의 막내 아우인 명서가 이우(李瑀)가 사위이다. 이우의 후손 이창룡씨가 2008년 관련자료 566점을 강릉 오죽헌 박물관에 기증했다. 금오산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글씨가 있다.
↑↑ 박록주 선생 기념 박록주로 |
박록주 명창(1905~1976)은 고아읍 관심리에서 태어났다. 판소리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됐으며,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 1971년 판소리보존회를 설립하여, 정통 판소리 보존과 후진 양성을 통해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2세 때 박기홍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운 후, 1926년 경성방송국 국악방송에 출연했다. 조선극장의 명창대회를 비롯 1969년 명동국립극장에서의 은퇴 공연까지 수많은 판소리와 창극 공연을 했다. 1964년 문화부장관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 문화재공로상을 수상했다. 현재 명창 박록주 전국 국악대전이 개최되고 있으며, 고향인 고아읍 관심리에 박록주로가 명명됐다.
↑↑ 김유영 선생 기념비 |
김유영(1907~1940 원호리 출신) 감독은 1927년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입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는다. 당시 김유영은 카프의 서광제, 임화 등과 힘을 합쳐 조선영화예술협회의 활동을 장악한다. 1920~30년 사이 ‘유랑’, ‘혼가’, ‘화륜’을 감독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영화의 이념을 주도했다. 1932년 일본으로 유학, 영화 연출과 기술을 공부했다. 1933년 구인회에 가담했으며, 극단 신건설에 참가했다가 1년 6개월 정도 수감되기도 한다. 또한 1938년 조선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 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1939년 영화 ‘애련송’을 감독하며 카프 사상에 입각했던 영화관을 폐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작이 된 영화 ‘수선화’를 촬영하던 중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그는 검열과 영상 미학의 부족에 의해 카프 영화의 종말을 몸소 겪었지만, 새로운 장르 그리고 특성을 불어 넣은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영화가에 입하야’, ‘세계프로영화발달사’, ‘영화예술운동의 신방향’ 등 영화운동론과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나운규 등과 함께 영화사를 개척한 인물이며, 고아읍 원호리에 그의 흉상과 기념비가 있다.
기자는 구미에서 15년을 살았다. 그 기간 동안 ‘고아’는 늘 길이라는 인상을 버리지 못했다. 고아는 구미와 선산을 연결하는 33번 국도의 중앙에 서 있기 때문일까? 왜 고아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그 길 위를 걸으면서, 통합신공항 시대 구미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고아의 꿈을 말한다.
2> 고아 길위에서 만난 사람들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