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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砥柱中流2] 구미발전은 교통의 변천과 함께...

지비저널 기자 입력 2020.10.26 09:48 수정 2021.04.04 13:33

구미발전은 교통의 변천과 함께...

                                    -소설가 정완식

 

↑↑ 구미 역사로 서울로부터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구미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무엇보다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이 인근에 결정됨에 따라 남은 과제는 KTX 구미역 신설에 최대한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시민들이 두 가지 사업을 숙원으로 삼은 이유는 구미의 발전은 교통과 직결되어있는 역사적 증명 때문이다.

 

구미는 조선 시대까지 선산군 남면으로 금오산성을 낀 한적한 촌락에 불과했다. 유사시에 들판을 불태우고 산성에 들어가 농성했을 것이 금오산성의 존재였다. 낙동강으로는 남해에서 올라온 장사치들의 배가 드문드문 멈추었던 갈대가 무성한 농촌이었다.

 

첫 번째 교통망의 확대는 경부선 철로였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준비하며 한반도를 관통하는 경부선을 부설할 때 노선은 전쟁의 필요성 때문에 금오산 뒤의 부상으로 지나가는 직선이었다. 구미지역의 경부선 노선개량은 1916년 무렵부터 시작됐는데 구미역이 이때 생겼다. 김천에서 구미를 돌아 왜관으로 통하는 곡선화로 진행되었다. 아마 선산, 구미 등 너른 평원 지역의 식량을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1919년 4월경에 경북 최대의 곡물상으로 자리잡는 이시가와(石川)란 사람이 들어와 구미 인근의 곡물을 사들여 도정 경부선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구미의 쌀은 구미면 원평리에 소재한 석천상회(石川商會)란 상호가 붙어 만주까지 팔려나갔다. 비록 구미면의 쌀이 이국에까지 수출되긴 했지만 타인에게 자리를 내주고 조연에 머무른 구미사람의 운명은 비극적인 역사와 궤를 함께 한다. 이 시기에 구미면이 외부로 통하는 최초의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구미가 두 번째로 비약적인 변모를 한 계기는 경부선 고속도로의 개통과 역사가 같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대전-대구 구간 개통으로 시작된 구미의 고속도로는 이후 구미공단이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수송하며,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철로와 고속도로를 갖춘 구미공단은 옛날 배가 오르내리던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과 결합했고 수많은 청년이 모여들며 비로소 새로운 역사의 대장정을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구미를 만들었다.

 

구미공단은 1973년 1단지, 1983년 2단지, 1992년 3단지가 완공돼 국내 최대의 전자, 반도체, 디스플레이의 산업단지로 성장했다. 2005년에 단일 산업단지로서는 최초로 3백억 불의 수출을 이룩해 우리나라 수출액의 11%, 무역수지 흑자액의 84%를 달성하게 되는데 30년 만에 이룬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우리 경제의 성장과 함께 날로 심화되던 물류비용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KTX사업이 시작되어 2004년에 KTX 경부선이 완공됐다. 그러나 국가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구미를 우회하는 노선설정은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물론 구미역에도 일부 KTX 차선이 정차했다. 그러나 곧 폐쇄됐고, 김천구미역에는 구미 손님들로 가득 찼다. 승객의 대부분이 구미를 찾는 손님들이었다, 교통망의 불편으로 불만이 가득했다. KTX가 구미를 피해 간 것은 구미발전에 찬물을 끼얹는 조치였던 것이다.

 

2016년, 구미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교통망 확충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다. 김천에서 구미까지의 이동시간과 비용 때문에 기업유치와 바이어나 고급 인력유치의 걸림돌이 된다는 여론이었다. 구미시민의 열망이 타올랐지만 아직 속 시원한 결론을 보지 못한 상태이다.

 

그나마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이 군위와 의성으로 결정됨에 따라 구미로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은 셈이다. 통합신공항의 결정과 함께 KTX 구미역의 신설은 이처럼 구미발전을 애타게 바라는 시민들의 시대적 염원인 것이다.

 

 

 

 

 

*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이며, 지비저널의 편집 방향과는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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