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최재화 선생 같은 분들이
전국 운동으로 주도했기 때문에
겨레의 대(大)운동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김판술 해평면 산양리 노인회장
↑↑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에 설치된 최재화 선생 기념비 |
최재화(崔載華)선생은 1892년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 산5번지에서 부(父) 최도원 모(母) 우서원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지으면서도 서당에 다녀 천자문과 동문선 등을 배웠다고 한다.
선생은 1907년 선교사 부루엔(Henry Munro Bruen)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문했으며, 선교사 안의와(James Edward Adams)의 추천으로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 1914년 졸업했다. 경신학교에서 독립운동가이던 김규식 교감 등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신문물에 대한 열망을 품고 191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일본대학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귀국, 모교인 경신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3.1운동을 맞아 경신학교 동창생인 이갑성 등과 함께 경신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의 만세운동, 4월 3일 선산군 해평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월말과 4월초 조선 상인들의 철시 투쟁을 이끌었으며, 4월 17일에는 혜성단(彗星團)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각종 문서(동정포시同情表示 경고문 警告文, 관공리동포 官公吏同胞 등)를 제작 배포한 제1차 최재화 사건(일제의 명명)이 발생한다. 혜성단원들은 각처의 관공리, 상인, 자산가들에게 각종 격문, 경고문, 탄원서를 제작 배포함으로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5월 14일 김수길이 체포되고 대부분의 단원들이 검거됨으로 제1차 최재화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일본 경찰의 경비망을 뚫고 탈출한 최재화 선생은 대구 달성공원에서 서로군정서에서 온 인사를 만나 국내의 청년들을 포섭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보내달라는 지령을 받는다. 이에 선생은 배승환, 김두칠, 강수남 등과 함께 조성순, 류우국, 권원하, 이재영, 조태연, 권재수, 김종엽, 천세환 등을 만주로 보낸다. 이러한 신흥무관학교 생도모집 사건을 주도한 계기로 일제는 또다시 제2차 최재화 사건으로 명명한다. 당시 최재화 선생은 상주에서 체포됐지만 탈출에 성공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1921년 2월 22일 있었던 궐석재판 결과 최재화 선생은 1차 2차 최재화 사건으로 징역 8년(1차 3년, 2차 5년)을 언도받기도 한다.
↑↑ 경상북도 이달의 독립운동가에서 재인용 |
중국으로 건너간 최재화 선생에게 있어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이 ‘한국의 위임 통치’를 윌슨 미국 대통령에 요청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에 김창숙, 신채호 등이 크게 반발했으며 이들은 ‘성토문’을 발표한다. 이 ‘성토문’의 서명자 54인에 최재화 선생이 포함된다. 그 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원동단우회에 참여했으며, 보황단 조직에도 참여했다. 또한 대한독립단 통남지단의 외무출장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참고 문헌이 없어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음.)
귀국 후인 1931년 대구 남성동교회(현 제일교회), 1943년 부산진교회 등에서 목사로 시무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그 후 194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계성교육재단 제2대 이사장, 대구장로회신학교 교장, 계명대학교 제2대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2년 최재화 선생이 서거한 직후인 1963년 경상북도와 선산 유지 등이 해평면 산양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1980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묘지는 기념비 인근에 위치한다.
현재 구미시 현충시설은 총9개가 있다. 충혼탑과 선산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동상, 호국용사 기림터, 인동 312 독립만세 운동기념탑은 지자체가 관리하고 황진박 선생 기념비,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교사 기념비, 독립지사 남상순 기념비 등은 사업회가 관리하고 있다.
↑↑ 김판태 산양리 노인회장(푸른색 잠바)과 윤종철 구미문화원 해평분원장 |
최재화 선생의 기념비 근처에서 만난 김판태(82세) 산양리 노인회장은 “최재화 선생은 풍채도 좋으셨다. 당시 낙동강을 헤엄쳐 도강을 하신 기억이 난다”며 지난날을 기억했다. 그러면서 “3.1운동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최재화 선생 같은 분들이 전국 운동으로 주도했기 때문에 겨레의 대(大)운동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세대가 가고나면 누가 그분을 기리고 해평면의 3.1운동을 기억하겠느냐”며 아쉬워했다.
윤종철 구미문화원 해평분원장은 “산양리 주민들이 갹출을 해 최재화 선생과 3.1 만세운동 행사에 드는 경비를 부담하고 있다”고 밝히며 “구미시에서 조금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국회의원과 시도의원 등에게 부탁을 드렸는데도 소식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구미시청의 관계자도 “사실 이러한 분들에게 지원해 줄 수 있는 조례나 법령이 없다”고 말한다. 윤종호 시의원도 “구미시에도 이런 분들이 몇 분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또 알려지지 않은 분들 역시 계실 것이다. 해당 조례가 있는지 살펴보고 없다면 조례를 만들어서라도 지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수많은 유,무명 분들이 역사를 지켜왔다. 특히, 독립운동의 역사는 더욱더 빛나는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해평면의 최재화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판태 산양리 노인회장의 “3.1운동의 가장 깊은 뜻은 그 불길이 방방곡곡으로 번져 겨레의 대운동이 되었다”는 말이 기자의 귓가를 맴돈다. 최재화 선생 같은 분을 기리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 민족에게 혼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