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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향토의 역사와 인물을 찾아서 1> 송당(松堂) 박영(朴英) 선생과 송당정사(松堂精舍)

대경저널 기자 입력 2022.01.02 09:46 수정 2022.01.02 09:50

[대경저널=대경저널기자]

향토의 역사와 인물을 찾아서 1> 송당(松堂) 박영(朴英) 선생과 송당정사(松堂精舍)

↑↑ 낙동강변에 위치한 송당정사


구미와 김천 등 인근 지역의 역사와 인물을 찾는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 선생을 찾았다. 조선 중기 문무를 겸비한 도학자 송당 박영 선생을 만나 그가 남긴 도학사상과 낙동강과 맞닿은 송당정사의 조선 중기 풍경과 만났다.

송당 박영 선생의 본관은 밀양이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부친은 군수 박수종(朴壽宗), 모친은 양녕대군의 외손인 정부인 이씨였다. 송당 선생은 일찍이 무인으로 출사했지만 문인으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붕-박영으로 이어지는 조선 도학계보를 잇는 중요한 학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 특히 병법에 관계된 책을 좋아하여 병법에 능한 인물들과 교류하는 한편, 21세가 되던 1491년 이극균 도원수를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으며, 성종의 훈계를 받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됐다. 그러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임금에 오르자 혼탁한 정치에 가족을 이끌고 고향 선산(善山)으로 낙향하여 정붕(鄭鵬 1467-1512)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정붕은 그에게 대학을 공부하여 도덕군자의 길을 걸으라고 했다고 전한다.

중종 때 다시 벼슬에 나아가 1509년에 다시 선전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삼포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되어 창원에 부임했다가, 1514년에 황간현감이 됐다. 1516년 강계부사로 승진, 치적이 뛰어나 동부승지가 되어 승정원에 재직했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고 같은 해 성절사에 임명되어 연경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왔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 탄핵을 당해 직급이 강등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됐다. 이듬해 김해부사가 되었다가 유인숙의 모함으로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로 풀려났다. 낙향하여 16년 동안 오직 학문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1537년에 복관되어 영남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고 전해온다. 무관출신이었지만 학문이 깊고 의술과 글씨에 능통했으며, 선산 금오서원과 황간 송계서원에 제향됐다.
↑↑ 송당정사 앞을 흐르는 낙동강. 냉산이 구름에 가려있다.


송당 선생은 박운(1493-1562)과 김취성(1492-1551) 등 젊은 유학자들을 월파정에서 만나 학문담론을 펼쳤으며 그후 사제관계를 이루었다. 송단 선생의 스승인 정붕 선생은 한훤당 조굉필(1454-1504)의 제자였다.

송당 선생의 학문은 자득(自得)이다. 그의 저서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에서 “학문하는 방법은 자득한 것이 없으면 무엇을 조존하고 함양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자득을 강조한 송당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 선생에게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여헌 장현광 선생이 중심이 되는 선산지역의 학풍과 남명 조식 선생의 학풍에는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것이 후대의 평이다.

구미시 선산읍 신기2길 109-1 길을 찾으면 송당정사(松堂精舍)가 위치한다. 이 송당정사는 1496년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여 집을 짓고 송당이라 편액했다고 전한다. 낙동강이 바로 앞에 흐르며 냉산과 마주하고 있는 이곳의 멋진 경관도 그가 이곳에 송당정사를 지은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현재 건물은 18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 한다.
↑↑ 송당정사 입구에 위치한 명경대 시비


송당정사는 두 번의 중건을 거쳤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200여년이 지난 후 정중로(1738-1816)가 첫 번째로 중건하였지만 또 다시 허물어져 권연하(1814-1896)가 중건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송당정사이다. 화사하게 짓지 않고 질박하게 지었다는 문헌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 경상북도문화재 644호로 지정됐다. 문목사란 사당은 종손과 문중이 힘을 합쳐 1983년 송당정사 뒤편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현재 송당정사와 문목사는 종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송당은 문무와 의학까지 학문의 폭을 넓혀 습득했으며, 실천했을 뿐 아니라 도학의 인맥을 종합하여 아우렀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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