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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砥柱中流23] 신분세탁의 과정

지비저널 기자 입력 2021.03.28 17:16 수정 2021.04.04 13:43

신분세탁의 과정

         -소설가 정완식

 

 지방선거에서는 영주자격을 취득한 지 3년이 지난 등록외국인도 투표권을 행사하므로 진정한 민의를 대표할 수 없다는 우려가 있다. 서울시의 경우 영주자격으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외국인은 4만5천여 명으로 대다수가 중국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투표권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신성한 참정의 권리를 얻기 위해 국방, 납세 등의 의무를 수행한다. 그럼에도 의무수행 없는 이국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함으로써 참정권이 신성은커녕 시간만 지나면 주는 자격증 정도가 돼 버렸다. 지지율이 어떻든 서울시장 투표는 개표를 해 봐야 승부를 아는 도깨비 표가 영향을 끼치게 돼 버렸다. 또 이 도깨비 표를 빙자한 무더기 표가 안 나온다는 보장도 못하게 됐다.

 

 1930년대 이후 동북항일연군이라 불리는 공산당 무장을 독립군이라고 인정하는 게 유행이 됐다. 그들을 일본군(사실 만주군) 싸웠다고 해서 독립군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대한의 독립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전투력이 형편없는 만주군을 상대로 전투다운 전투는 해보지 않고 피해 다니기에 바빴고 목표는 프롤레타리아 공산국가의 건설이라는 거창한 목표도 별로 없었다.

 

 1920년대 후반 만주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1926년 조봉암, 최원택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한 후 조선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3차에 걸친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지휘부가 대거 검거되고 코민테른과 중공당의 1국1당주의(一國一黨主義)에 의해 중공당에 흡수되었다. 중국 영토인 만주에는 중국공산당 조직만 인정한다는 코민테른과 중공당의 논리였다. 1930년 중반까지 조선공산당 각파 만주총국은 해제하고 중공당 만주국에 가입하게 돼 비록 세 차례 간도당 사건으로 만주총국이 와해됐지만 조선인이 중공당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기에 1932년 말부터 1936년 초까지 민생단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공산당원 일부를 일본 첩자조직인 민생단으로 몰려 1천여 명이 넘는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조선인과 중국인 공산당원들에게 맞아 죽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10년 사이에 조선인의 우수한(?) 공산당원들이 대거 사라졌다.

 

 1930년대 초에 소련에서 유학을 마치고 양림(楊林)이 만주로 들어왔다. 그는 1920년대 초의 독립운동가 김경천과 함께 김일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 청산리 전투의 김훈(金勳) 중대장이다. 1920년대 중반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주은래에 의해 공산당원이 된 사람이다. 그는 동북항일연군의 모체가 되는 유격대를 조직하고 강서성으로 떠났다가 대장정을 마치고 전사했다. 사람들은 그를 통상 김일성으로 알고 있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일부는 반일의 깃발을 내걸었지만 그리 신통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흔히 무슨무슨 전투로 일본제국주의에 타격을 줬다느니 하는 말도 그들이 내세우는 선전선동의 확대 과장에 불과하다. 면 소재지를 습격해 민간인 몇 명, 순사 한두 명 죽이고 대첩이라고 내세우는 등이다. 신민부, 참의부, 정의부 시절에도 하던 투쟁이었다.

 

 그 후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피신했다가 승전군으로 들어와 독립운동으로 분장해 대단한 개선장군이 되었다. 만주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후배는 국공내전에 참가했다가 중국이 통일되자 늘 그래왔듯이 필요가 없어져 성가신 무력이 되고 말았다. 각본대로 토사구팽의 운명을 맞아 조국의 침략전쟁에 들어와 포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뒤에서 조종한 세력만 아직 대를 이어 건재하며 독립운동의 탈을 쓰고 있어 몇몇 선동가들에 의해 떠받들어 지고 있다.

 그들을 받드는 사람들과 그들을 이용한 사람들, 이용당한 사람들이 지금 보궐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견해이며, 지비저널의 편집 방향과는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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